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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3 초기 기독교 문명과 미술 더 이상 인간은 외롭지 않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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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3 초기 기독교 문명과 미술 더 이상 인간은 외롭지 않았다

Any Corns 2019. 5. 5. 18:41
양정무 지음


팍스로마나(대 평화기)
96년 ~ (117년 ~ 138년 하드리아누스) ~ 180년///(콤모두스 ~ 192년)

군인 황제 시대(대 혼란기)
235년 ~ 284년///(디오클레티아누스 ~305년) ~ 306년(콘스탄티누스~)

로마 제국에 매년 군사 반란으로 황제가 바뀌기 시작하며 로마는 혼란에 빠짐.
 
후반기로 갈수록 허황된 약속과 예언을 남발하는 종교들이 성행.
 
비밀스러운 의식을 가진 미트라교가 후기 로마를 대표하는 종교가 됨.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기독교는 부활과 영생이라는 강력한 교리를 내걸고 로마 제국의 실패한 공동체 윤리를 대신하게됨.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을 줌.
 
중세=후기 고전기
 
서술하는 역사가의 입장 차이일 뿐.
 
 
전차경주장 부조, 110~130년, 바티칸 박물관

 

전차 경주장 관리인이 생전에 자신이 하던 일을 새긴 작품으로 보기도 하고, 무덤 주인공이 생전에 전차 경주장에서 거둔 승리를 회상하는 작품으로 해석하기도 함.
 
2세기 초 로마에서 제작된 이 무덤의 주인은 왼쪽의 짧은 머리 남성.
 
제일 뒤에 있음에도 머리가 제일 크게 표현되어 있음.
 
왼쪽에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아마 남편보다 먼저 죽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부인 표현, 승리한 전차 경주자가 앞에 위치.
 

 

욕심이 지나쳐서 부자연스럽게 무덤 장식에 욱여넣은 느낌.
 
VS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기념주, 161년, 로마 캄푸스 마르티우스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D%86%A0%EB%8B%88%EB%88%84%EC%8A%A4_%ED%94%BC%EC%9A%B0%EC%8A%A4

 

안토니누스 피우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는 로마 제국의 제15대 황제(86년 9월 19일 - 161년 3월 7일)이다. 5현제 중의 한 명으로 꼽히며, 피우스는 '경건한 자'라는 뜻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주어진 존칭이다. 선제(先帝)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계승한 그의 치세는 대체적으로 평온하였다. 단지 군사 원정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야만족의 발전을 허락하여, 후대에 화근을 남겼다고도 일컬어진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외할

ko.wikipedia.org

 
기념주 받침대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부부가 신이되어 승천하는 장면이 조각.
 
원근법을 지켜 앞쪽의 수호신을 크게 뒤에 있는 황제 부부는 작게 처리.
 
날개 달린 수호신 위에 올라타 있고 양쪽으로는 매가 호위 중.
 
수호신의 발 아래에는 오벨리스크를 안고있는 캄푸스 마르티우스.
 
오벨리스크?
이는 황제 부부의 승천 의식이 있었던 일종의 광장인데 의인화해서 표현.
 
맨 오른쪽의 여신은 로마를 상징하며, 여신이 들고 있는 방패에는 로마 건국 설화 내용인 로무스와 레무스가 늑대 젖을 먹는 모습이 새겨져 있음.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AC%BC%EB%A3%A8%EC%8A%A4%EC%99%80_%EB%A0%88%EB%AC%B4%EC%8A%A4
 

로물루스와 레무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로물루스(Romulus)는 전설적 로마의 건립자이며 초대 왕이다. 전설에 의하면, 로물루스는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전쟁의 한 영웅인 아이네아스(Aeneas)의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라티누스(Latinus)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로물루스에 관한 전설은 로마의 고역사가 파비우스 픽토르(Fabius Pictor)의 설에 의한 것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탄생설화[편집] 파비우스의 설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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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경주장 조각이 그리스 로마 조각의 전통을 따르는데 관심이 없었고, 주인공의 과시욕이 크게 작용했다면, 이 조각은 인체의 비례도 일정하고 옷 주름의 묘사도 훨씬 섬세하며 자연스러움을 알 수 있다.

 

후대로 갈수록 대세가 된 조각은 전차 경주장 부조.

 

후기 고전기 이후의 조각은 인물과 배경이 섬세하지도, 사실적이지도, 비례하지도 않고 퇴보하기 시작함.

 

 
헤라클레스 모습을 한 콤모두스 황제 조각, 192년, 카피톨리노 박물관, 로마
 
스스로 헤라클레스의 화신이라고 주장할 만큼 망상에 빠져버린 콤모두스의 조각을 보면 피부는 매끈하고 머리털과 수염은 오밀조밀하여 부자연스러움.
 
장식 뒤에 튼튼한 기둥이 받쳐져 있는데 앞쪽에는 방패와 뿔 같은 것으로 교묘하게 가려 보이지 않게한 것으로 보아 콤모두스 황제는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포장하고 싶었을지 모른다고 볼 수 있음.
 
결국 부하 장군에게 살해당하는 콤모두스 황제.
 
고대 그리스에서 볼 수 있는 조각의 신성성이 약화되고 개인적 과시가 강화됨을 알 수 있음.
 
VS
 
아우구스투스 황제, 기원전 20년, 바티칸 박물관
 
 
아우구스투스 조각상은 로마제국이 막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도약하는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
 
갑옷을 입고 고전적인 영웅의 모습.
 
 
 
로마제국이 쇠퇴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죽음에 집착하게 됨.
 
원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을 선호했고 그 풍습이 로마까지 이어졌음.
 
그런데 화장 대신 매장이 퍼지기 시작한 때가 1~2세기, 로마가 가장 번영했었던 시기.
 
우리나라가 매장 의례로 하던 유교적 풍습에서 실용적인 현대 산업사회로 접어 들면서 화장이 선호되었듯, 로마는 반대 현상이 발생.
 
로마는 즉, 의례를 점점 중시하는 사회로 변해간 것.
 
전쟁 석관, 180~190년, 로마국립박물관
 

The Sarcophagus with the Triumph of Dionysus

 
로마시 근교에서 출토된 2세기 말의 석관에서 이민족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는 로마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가운데 말을 타고 한 손으로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무덤의 주인이다.
 
아래에 깔린 게르만족은 무질서하고 허둥지둥하며 위쪽의 로마 사람들은 근엄한 모습으로 적을 짓밟고 있다.

 

이렇게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관은 죽음에 대한 로마인들의 관점이 바뀌고 있다는 점을 보여줌.

 

미술을 통해 과시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로마는 점차 혼돈에 빠지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Arch of Constantine/Arco di Costantino), 315년, 로마
 
로마 시 한 가운데에 이 조각 기술의 퇴보가 드러나는 예를 볼 수 있는데 바로 개선문.
 
이 개선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과거의 조각 작품을 수집해다가 편집해서 붙인 작품이기때문.
 
빼앗거나 훔쳐왔다고해서 약탈품인 스폴리아Spolia라고도 불림.
 
4세기부터 유행한 스폴리아 양식은 제작 능력이 없어 퇴행적인 양식이다 VS 적극적으로 과거의 유산을 해석한 결과다라고 해석되기도 함.
 
의도치 않게 시대의 흐름에 따른 조각 기술의 변화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콜라주와 같은 작품이랄수도.
 
원 안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조각으로 사람들의 키가 크고 늘씬하며 옷자락 표현도 자연스러움.
 
아래 조각은 대략 200년 후에 개선문이 제작될 때 만들어진 조각이나, 사람들은 땅딸보같으며 옷의 주름도 반복적으로 처리되었을 뿐이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됨.
 
로마 제국은 다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에 너그러운 편이었으나,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일신 이외의 다른 모든 신을 인정하지 않았고, 황제를 신처럼 받는 것도 우상 숭배라고 거부함.
 
모든 이가 신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 교리조차 로마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림.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을 기름천에 둘둘 말아 인간 횃불로 썼다는 설.
 
산 칼리스토, 카타콤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은 로마 인구 증가에 따라 시신을 묻을 지상 공간이 부족해지자 만든 시설.
 
시신을 그대로 묻기 때문에 화장된 유골을 안치하는 납골당과는 다름.
 
벽에 토굴을 층층이 파서 간단히 만들거나 지하 신전처럼 만들기도 함.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한 좁은 공간이었던 카타콤은 기독교인이 비밀리에 모이는 장소라기 보다 일시적인 피난처였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