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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4 중세 문명과 미술 지상에 천국을 훔쳐오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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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4 중세 문명과 미술 지상에 천국을 훔쳐오다

Any Corns 2019. 5. 5. 03:17

양정무 지음

 

p.19

" 사실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중세 뒤에 이어지는 유럽의 근대를 더욱 아름답고 빛나는 시기로 포장하려는 역사 서술 방식 때문입니다. 서양의 근대는 르네상스로 시작하죠. 르네상스를 빛과 영광의 시대로 강조하기 위해 비교 대상이 되는 직전 시기를 낮춰 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

 

다시 말하면, 중세 유럽은 편견과 달리 매우 힘차고 활력이 넘쳤다는 사실

 

중세 봉건제

영주

기사

농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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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산치오, 샤를마뉴의 대관식, 1516~1517년, 바티칸 박물관

교황 레오 3세가 800년 크리스마스 미사에서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D%8C%8C%EC%97%98%EB%A1%9C_%EC%82%B0%EC%B9%98%EC%98%A4

 

라파엘로 산치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이탈리아어: 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년 4월 6일 ~ 1520년 4월 6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흔히 라파엘로 불린다. 《아테네 학당》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아테네 학당>은 플라톤, 유클리드,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의 학자가 학당에 모인 것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라파엘로는 이탈리아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그는 화가이자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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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야만인들이 기독교를 통해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더 합리적인 통치가 가능해진 것이다. 무력에다가 신앙심까지 갖춘 정의로운 기사가 등장하므로써 중세 기사의 낭만적인 무용담도 나오게 되었다는 것.

 

기독교가 계약만으로는 부족했던 통치의 명분을 채워준 것이나 다름 없으니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황이 직접 씌워주는 왕관은 신이 내린것이나 마찬가지.

 

이때부터 유럽에서 왕위에 오르려면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다. 교황은 왕을 국가의 지도자로 인정할 수 있는 권위까지 쥐게된 것.

 

샤를마뉴는 게르만 민족의 왕으로, 게르만인은 로마인들이 야만족으로 취급했었다. 

 

그림상 황제가 무릎을 꿇고 아래에 위치, 교황이 위에서 관을 씌워주는 형국.

 

교황은 황제에게 통치의 권위와 명분을 제공하고 황제 샤를마뉴는 교황에게 비잔티움 제국과 이민족의 침입을 막을 군사력을 제공한 셈.

 

유럽의 전경

 

중세의 성, 교회, 넓은 경작지

 

당시 농노나 피지배층은 영주의 성이 자신을 물리적으로 보호해주고 교회는 신앙적으로 보호해준다고 생각했을 것.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 성인의 유해가 묻힌 로마

 

마가 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코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베네치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이 3 장소가

 

7세기부터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 성지순례처인 예루살렘보다 중세 유럽인들에게 각광 받았다.

 

즉, 최고의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되찾고자하는 중세 유럽인의 소망이 11세기 십자군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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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sades 십자군 전쟁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 콜로세움을 보면 아치가 건물 전체를 빙 두르고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D%9C%EB%A1%9C%EC%84%B8%EC%9B%80

 

콜로세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른 뜻에 대해서는 콜리시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콜로세움(Colosseum, 이탈리아어: Colosseo 콜로세오[*])은 고대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로마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동상(巨像:colossus)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서기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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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교회

 

돌처럼 무거운 재료로 높은 건축물을 짓는 일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고안한 방법이 아치와 2층 회랑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모두 아치 뼈대로 연결해서 무게를 버티게 했고,

 

회랑을 2층으로 만들어 쌓아 올리면 아치를 더 많이 활용하게 되어 석조 건축을 지탱할 수 있게 된다는 것.

 

하지만, 건물에 2층 창이 막혀버리기 때문에 로마네스크 성당 안에 들어가면 실내가 어둡다.

 

빛이 풍부하게 들어오질 못하기 때문.

 

바실리카 건축의 특징이었던 밝고 명랑한 내부가 사라지면서 어둡고 칙칙하게 변하게 됨.

 

이는 나중 고딕 건축에서 해결된다.

 

 

교회; 개신교의 성전

성당; 가톨릭의 성전

 

하지만 개신교가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에는 이런 구분이 없었다는 사실.

 

대성당; 규모가 큰 성당 X, 주교가 자리한 지역에 있는 주교좌 성당을 가리킴

주교; 기독교 사제 중 고위 성직자에 해당

대주교; 주교가 맡은 지역이 크거나 중요할 경우 주교를 격상시켜 부름

 

영국, 프랑스에서 대성당; Cathedral

이탈리아에서 대성당; Duomo

독일에서의 대성당; Dom

 

어차피 대성당은 한 지역에 하나뿐이니 정식 이름보다 ㅇㅇㅇ대성당/두오모/돔/캐시드럴 이라고 부른다.

 

예)

이탈리아 피렌체의 대성당

정식이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Cathedral of Santa Maria del Fiore)

그냥 피렌체 두오모라고 부른다는 것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

 

https://www.duomomilano.it/en/

 

Duomo di Milano

Official website of Duomo di Milano, valued and guarded by the Veneranda Fabbrica del Duomo. It is dedicated to Santa Maria Nascente and it is located in the main square in the center of the city.

www.duomomilano.it

 

대성당의 으리으리한 첨탑은 순례자나 상인들에게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그들이 모여들면서 상점, 식당, 숙박업소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대성당 주변이 그 지역의 가장 큰 번화가가 된 것.

 

오늘날 유럽의 풍경이 바로 이 대성당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의 모습.

 

수도원; monastery, abbey, minster

 

수도원은 교회가 생겨나던 시기부터 중세까지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였다.

 

수도원의 수장인 수도원장도 주교에 뒤지지 않는 권위를 지녔는데, 오래된 유럽의 어떤 수도원은 규모가 대성당보다 큰 곳도 있다. 

 

 

교회는 피라미드 구조

 

성직자 계급 최상위에는 교황

주교 중에서도 교황을 선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성직자는 추기경

주교나 대주교

사제

 

일반 사제가 맡은 곳은 성당, 주교나 다른 고위 성직자가 자리한 성당은 대성당

 

교구; 주교가 관할하는 교회에서 정한 행정구역

 

 

1906년 여름, 이교도의 손아귀에 있는 성지를 되찾자는 종교적 명분으로 대규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

 

약 200년간 예루살렘과 주변 땅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다.

 

기독교는 이를 십자군 전쟁Crusades이라 부르고, 이슬람교는 이를 지하드Jihad라 부른다.

 

전쟁중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에 가보게 되는데, 발달된 과학 지식이며 제국의 화려함, 웅장한 석조 건축물, 황금빛 모자이크화에 충격을 받게 된다. 

 

스페인 포함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부분이 8세기 부터 이슬람 왕조의 수중에 있었다.

 

지중해 연안의 남부 프랑스, 이탈리아도 이슬람 해적의 약탈에 당하고 있었던 수준.

 

시칠리아의 경우 아예 9세기 초부터 이슬람 지배하.

 

피사나 베네치아같은 해상 도시가 생기면서 이슬람 해적과 싸움에서 승리하기 시작.

 

노르만족 기사들이 반전을 돕게 되는데 이들이 이슬람을 몰아내고 남부 이탈리아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 노르만족 기사들이 11세기 초부터 이탈리아 남부에 와서 용병으로 활동했고 곧 왕국까지 건설한다.

 

시칠리아에 1091년, 노르만 왕조를 세운다.

 

 

1차 십자군 원정 경로인 피사

 

피사의 사탑은 기적의 광장에 위치해 있다.

 

피사의 사탑(종탑) - 피사 대성당(본당) - 세례당

 

기울어질 사, 종루가 있는 종탑인 피사의 사탑은 높이가 55미터에 이른다.

 

세워진 직후부터 지반이 조금씩 가라앉는 바람에 15도 정도 기울어지게 됐다.

 

피사 대성당은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건축양식과 이탈리아 반도 고유의 미술 저통이 혼합된 건축물로 흰 대리석 외관이 산뜻한 느낌을 주며, 11세기 피사의 번영을 아주 잘 보여줌

 

피사 대성당 본당은 1063년부터 1118년까지 지어져 12세기 초반 완공되었고, 13세기 초에 규모를 확장시켰다.

 

길이가 100미터에 정면의 폭은 35미터, 정면쪽 높이는 34미터, 성당 내부 정면에는 거대한 모자이크화가 자리잡고 있고 모든 벽은 흰색과 붉은색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금박을 입혀 장식한 천장도 인상적이다.

 

피사는 이 성당을 짓기 전에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를 약탈하여 대성당을 짓는데 활용한다.

 

토스카나식 로마네스크

 

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성당은 대부분 형태가 단순, 기하학적으로 다듬어짐, 흰색 대리석 바탕위에 짙은 색 대리석을 집어 넣어 멋을 부림, 지역마다 다른 모습.

 

피사 대성당 정면에는 위아래로 아치와 기둥들이 줄지어 있는 모두 4단의 아케이드가 있다.

 

기능보다는 장식 목적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남부에서 자주 쓰는 건축 기법

 

아케이드 덕분에 정면이 아주 화려해지고, 햇볕이 그림자를 짙게 만들어 깊이감도 느껴지고, 반원형의 아치 덕분에 보기 좋은 율동감도 생김

 

훗날 피사 종탑을 지을 때 4단이었던 아케이드를 6단으로 늘림

 

1173~1372년 원통형의 피사 대성당 종탑은 아치가 촘촘하게 활용되어 고대와 자신들이 연결되어있다는것을 보여주려고 했을 수도 있다.

 

옅은 갈색, 옅은 청록색 등 형형 색색의 돌로 세밀하게 꾸며진 아치에도 레이스처럼 정교한 장식을 넣었고 전체적으로 정성이 많이 들어간 건축.

 

종루

6단의 아케이드

기단부

 

https://ko.wikipedia.org/wiki/피사의_사탑

 

피사의 사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피사의 사탑( - 斜塔, 이탈리아어: Torre di Pisa)은 이탈리아 서부 토스카나주의 피사에 있는 피사 대성당의 종루(鐘樓)이며 관광 명소이다. 기울어진 탑으로 유명하다. 1173년 8월 9일 착공 시에는 수직이었으나, 13세기에 들어 탑의 기울어짐이 발견되었다. 높이는 지상으로부터 55m, 계단은 297개로 이루어졌으며, 무게는 14,453t이다. 지반에 가해지는 평균 응력은 50.7tf/m2란 계산 결과가 나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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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 세례당

 

https://ko.wikipedia.org/wiki/%EC%82%B0_%EC%A1%B0%EB%B0%98%EB%8B%88_%EC%84%B8%EB%A1%80%EB%8B%B9_(%ED%94%BC%EC%82%AC)

 

산 조반니 세례당 (피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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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는 곳인 이 곳은, 세례 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 속에 담그는 방식으로 세례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도로 큰 건물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아치 기둥이 띠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어 이탈리아 중부 특유의 토스카나식 로마네스크 양식.

 

아래는 로마네스크 양식이지만 위쪽은 고딕 양식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 교회와 매우 유사하고, 특히 내부를 보면 둘의 연관성이 아주 커 보인다.

 

둥근 내부 공간을 따라 원을 그리며 서 있는 기둥의 모습,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규칙적으로 배치된 모습

 

피사 사람들은 이 세례당을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 교회처럼 만들어, 피사가 성지를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듯.

 

세례당 내 설교단에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각 면에 새겨져 있는데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조각으로 여겨짐.

 

 

당시 유럽에서 출발한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베네치아에 집결.

 

4차 십자군에 이르자 병력이 쉽게 모이지 않았고 뱃삯과 체류비가 빚더미에 오름.

 

베네치아인들이 지중해 동쪽에 위치해 교역권을 차지하는데 중요한 거점인 '자라'라는 도시를 되찾아주면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함.

 

십자군은 이에 응했고 자라를 점령함.

 

점점 더 큰 계략에 빠진 십자군.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키로 함.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같은 기독교인을 공격함.

 

십자군 원정대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십자군이 약탈한 전리품을 자기것으로 만듦.

 

비잔티움 제국은 1261년 십자군을 몰아내고 제국을 복원하지만 결국 1453년 이슬람의 공격으로 멸망함.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

 

https://en.wikipedia.org/wiki/St_Mark%27s_Basilica

 

St Mark's Basilica - Wikipedia

Church in Venice, Italy The Patriarchal Cathedral Basilica of Saint Mark (Italian: Basilica Cattedrale Patriarcale di San Marco), commonly known as Saint Mark's Basilica (Italian: Basilica di San Marco; Venetian: Baxéłega de San Marco), is the cathedral ch

en.wikipedia.org

화재로 몇 차례 소실된 후 현재의 모습은 1063~1094년 재건된 것.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건축물

 

아치 모양의 정문은 로마네스크 양식, 커다란 다섯개의돔은 비잔틴 양식

 

피사와 베네치아는 라이벌 관계

 

온통 황금빛으로 칠해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내부는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반구 모양의 돔은 하기아 소피아 같은 비잔티움 제국의 건축을 모델로 해서 지은 건물.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성 사도 교회를 모델로 해서 지어졌을 거라 추측, 평면도상 비슷.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은 뒤 묻힌 곳.

 

돔 아래 부분을 빙 돌아가며 자리한 창이나 돔과 돔을 받치고 있는 역삼각형의 펜던티브 같은 부분이 하기아 소피아의 내부와 비슷함.

 

베네치아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서 지중해 동서 무역을 해나가던 무렵 유럽은 비잔티움 제국이나 아시아 지역에 비해 문화 수준이 많이 뒤떨어져 있었음

 

때문에 베네치아는 스스로를 우월한 비잔티움 제국의 일원이라고 생각.

 

비잔티움 제국 역시 북부 이탈리아 지역 영토 잃은 상황이었기에 자기들에게 우호적인 베네치아가 반가웠을 듯.

 

13세기부터 세력이 점차 강해진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원정 때 비잔티움 제국에서 약탈해 온 보물들로 산 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하기 시작.

 

성당 정면의 네 마리의 말 조각은 승리의 콰드리가라고도 불리는데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전리품.

 

복제품이고 진품은 박물관에 보관 중.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에 만든 것이 비잔티움 제국 손에 갔다가 베네치아로 오다니 기구한 말의 운명.

 

황금 제대화인 팔라도로, 1105~1345년, 약탈한 보석과 채색 대리석으로 호화롭게 꾸밈.

 

때문에 산 마르코 대성당을 전리품의 전시장이라고 냉소적으로 평가하기도 함